“ 좋은 그림은 인생을 보여줍니다 ”

 

김옥조 광남일보 사회부장

 

광주 유일한 상업화랑을 경영하면서 광주미술의 현장과 고락을 함께 해온 양승한 나인갤러리 관장(50). 양 관장은 “10년이 넘으니 이상하게도 사회적인 책임감이 느껴지고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지역미술계에 대한 소명의식이 앞서더라”면서 “하나님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식으로 계획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화랑 11년차부터 미술시장이 눈에 들어온 느낌을 받았으며 멀리 바라보는 지혜를 배웠다 할 수 있다”며 “이제는 매력적인 직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지역화랑 경영자로서의 소화를 털어놨다.

올 베이징 · 시드니 · 상해 아트페어 참여…내년부터 본격적인 해외진출 시도

 

대표님.JPG

개인적으로 나 자신에게 ‘그림’은 무엇입니까?

그림을 보면 작가가 추구하는 고뇌, 아름다움, 이상적인, 허무적인, 환희 또는 퇴폐 등. 다양한 세계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예술가의 인생 엿보기와 그 속에서 자신의 인생 돌아보기가 보여진다. 나의 아버님은 “좋은 그림은 술 취하여 보았을 때 좋고(비이상적) 술이 깨었을 때 보아도 좋은 것이 좋은 그림이다(이상적)” 라고 말씀하셨다.

그림은 나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향으로, 그림을 진지하게 때로는 광기 어린 듯 그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으며 특히 아버지와 배동신 선생님의 기억은 참 멋있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식들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하셨고 저희들 역시 예술가의 고난한 삶을 보아온 터라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자연스레 그림과의 인연은 멀어졌다. 그러나 세월은 다시 나를 그림이라는 세계로 불러들였으며 현재는 어쩔 수가 없는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그림은 인생의 축소판으로 보고 있다.

 

 

광주의 유일한 상업 화랑으로서 자리를 지켜온 남다른 각오와 생각을 밝혀주시죠?

처음부터 화랑의 길이 이러한 줄 알았으면 접근 안했을 것이다. 열악한 지역문화 환경에서 처절하도록 버티기의 연속이었다. 게속된 전시 기획이었지만 부진한 판매실적으로 좌절을 맛보고 직원봉급 밀리기가 일수였다. 이러할 때 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무슨 끈에 이끌린 듯 14년을 이어왔다. 사실 화랑운영에 있어서 나의 집사람(박성란, 공무원근무)의 이해와 도움이 가장 컸다. 10년간만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예술쪽 일은 10년이 가도 감감하기만 하였다.

 

 

광주미술시장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지역작가들을 초대하는 기획전을 마련해 오고 있는 지역미술계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입니까?

IMF 이후 서울 쪽 뿐 아니라 광주에서도 마치 도미노 식으로 화랑이 폐업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러할수록 전문 화랑으로 길을 잡았다. 광주에서는 화랑들이 거의 대관위주의 화랑운영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갤러리를 통하여 알려진 작가가 드물고 화랑을 통한 작품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고 컬렉터 발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가끔은 이윤이 나지 않는 기획전과 좋은 작가의 초대전은 화랑의 색깔을 분명히 하는 효과가 있다. 오너의 결단력이 필요하다. 나는 전시 기획을 할 때 가장 상업적인 기획을 하지만 그 속에는 비상업적인 요소를 꼭 넣는다.

또한 비상업적인 전시기획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상업적인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기획전과 초대전은 힘들지만 상업갤러리가 갖고 있는 고유의 역할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작품유통과 작가발굴의 본연의 기능에 힘써야 갤러리의 철학을 내포할 수 있다. 또한 고객들은 지역미술에 대한 애정으로 지연, 학연에 의한 작품구입도 계속되어야 하나 다양한 작가군의 작품성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할 것이다.

 

 

뉴욕아트페어, 한국국제아트페어 등을 들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성과가 있다면?

열악한 경제사정에 맞물린 광주에서의 아트페어 참여는 많은 힘이 들지만 늦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자신한다. 광주미술은 세계 미술시장에서도 충분한 작품성과 시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유명작가가 되기 위해 많은 과정이 필요하였지만 지금은 아트페어 시장에서 두각을 내면 몇 단계를 넘어서 인기작가로 유명세를 탈 수 있다.

2006년 KIAF 때는 시장을 못 읽어 적자를 보았다. 2007년에는 그 수업료를 지불한 보답으로 상당수의 작품을 판매하였고 수입고 괜찮았다. 뉴욕아트페어에서도 외국인의 놀라운 호평을 받으면서 좋은 반응에 놀랐고 자신감을 얻었다. 올해에는 9월 베이징, 10월 시드니, 11월 상해 아트페어를 광주작가와 함께 참여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올해에는 아트페어 시장 공부를 하는 한해가 될 것이고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할 것이다.

 

 

미술계에 몸담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나 보람을 맛본 경우를 소개해 주시죠?

2000년 주홍 화가와 고근호 조각가의 ‘즐거운 상상 展’이란 전시를 겸한 결혼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피아노 소리가 나는 가운데 나의 갤러리에서 예술가 부부가 탄생하는 것을 보고 큰 보람을 느꼇다. 가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주홍, 고근호가 두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면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 2007 KIAF 행사 때 나인갤러리 부스에 수도 없는 관람객과 화상, 갤러리 오너들이 광주미술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고 광주미술을 다시 보아야겠다는 많은 말을 들을 때 나는 그들에게 “나인갤러리는 광주에서 젊은 작가 7명만을 선보였을 뿐입니다. 광주에는 경제가 약하여 갤러리가 부족한 반면,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작가들이 많으니 여러분들께서 광주작가에게 관심을갖고 직접 보석을 캐듯이 발굴하십시오.”라고 마치 지역미술 전도사가 된 듯 말하였다.

또한 이 행사에서 이이남 이라는 영상작가가 최고의 인기를 끌었으며 국내 및 세계적으로 많은 화상으로부터 콜을 받는 즐거움을 느꼈다.

 

 

부친 양수아 미술관 건립이 마지막 꿈이라고 했는데 구체적 계획은 있는가?

3년 전 광주미협 주관으로 양수아 미술관 건립 추진위를 구성하였으나 아시아 문화의 전당 건립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에 묻혀 수면에 가라앉아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재정도도 문제지만 유족역시 내놓을 부지도 없고 하여 시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화가 양수아는 역사의 굴곡을 겪으면서 치열한 예술혼과 추상미술의 불모지인 광주에 씨를 뿌렷던 1세대 예술가였으며 한창 작품시기에 요절하였다. 양수아 미술관이 왜 필요하냐 하면 태평양전쟁, 만주사변, 해방, 제주 4·3사전, 6·25, 빨치산 그리고 평생을 따라다닌 부역딱지... 이와 같이 한 작가가 격변기의 근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하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그림에는 지식인의 고뇌와 그리고 이상과 현실사이를 자화상과 앙포르멜화 한 추상미술로 표현하였으며 그 방식은 알코올로 택하였고 결국 52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무너지고 말았다. 높은 회화성에도 불구하고 상업성이 적어 항상 가난하였던 화가이기도 하였다. 물질이 풍요하고 예술이 상업화 되가는 21세기에서 후배 화가 또는 미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양수아는 예술을 위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제시할 것이다.

끝없는 내부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인생가체가 극히 예술적이었으며 예술가로서의 지독한 가난과 비구상 그림의 몰이해 속에서도 낭만을 잃지 않고 놀라운 작업세계를 보여준 것은 양수아 미술관을 통하여서 후세들에게 큰 공부가 될 것이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미술사업이나 지역미술계가 해야할 것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해보고 싶은 것은 광주에 대형 갤러리를 개관하고 싶고 서울에도 갤러리 분점을 내어서 우수한 광주작가의 미술을 중앙에 알리고 서울의 수준높은 컬렉터들에게 광주미술을 판매하고 싶다. 또한 나인갤러리를 통하여 스타작가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지역미술계는 희망이 많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유로는 아시아 문화의 전당이 건립이 되면 많은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앙 미술계에서도 광주작가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많은 편이므로 중앙미술계과 국제아트페어에 적극 참여하여 자기의 미술을 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