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이만난사람] 화가 주홍씨
창작인은 `문화의 세포’…세포를 활성화시켜야
이광재 jajuy@gjdream.com
기사 게재일 : 2009-01-21 07:00:00

그는 40대 초반의 화가다. 지금껏 14차례 개인전을 가진데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 준비중인데서 알 수 있듯 자신의 일에 성실한 작가다. 조각가인 고근호(43) 씨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면서 전업작가로 활동한다는 게 좀 다르다면 다를까.

그의 이름엔 색깔이 들어 있다. 주홍(41). 이름처럼 만나보면 따뜻한 느낌이 배어난다. 하지만 그의 평범해보이는(?) 삶 속엔 광주 문화예술인들의 고민과 희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담양 작업실에서 대인시장으로

주 씨는 담양에 있던 작업실을 지난 연말 광주 동구 대인시장으로 옮겨왔다. 광주비엔날레와 함께 불기 시작한, 작가들의 빈점포 입주행렬에 가세한 것이다.

남편과 작업실을 나눠써야 하니, 예닐곱평쯤 돼보이는 공간이 그리 넉넉진 않다. 하지만 “늘 남의 공간에 얹혀 살았는데, 나만의 작업공간을 갖긴 처음”이라며 만족해한다. 일년에 250만원이라는 ‘저렴한’ 세도 매력이지만, 비단 그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활기가 느껴지고,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나 작가들과 편하게 어울릴 수 있어 좋단다. “미술가에겐 작업 자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지요. 미술은 제게 가장 아름다운 소통의 도구이자,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해요. 그런 점에서 재래시장은 안성맞춤이죠.”

이웃 점포의 상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작가라는 이들의 작업실 풍경은 참으로 희한해 보일 게다. 상인들은 새벽 5시에 나와 문을 여는데, 작가들은 점심나절 다돼서야 푸석한 얼굴로 얼굴 내밀기 일쑤다. 그렇게 나와서도 물건을 파는 것도 아니다. 밤 늦도록 작업실에 불켜놓고 뭔가 뚝닥거리는 곳이 예술가들의 작업실이니까.

“하지만 자연스레 대화가 가능해요. ‘뭣허요. 저런 것도 그림인갑네, 나라도 그리것다. 그런 것도 판다고? 고것도 팔리네잉’ 하면서 마음의 문이 열리죠.”

생활 속에서 서로 인식이 확장되는 곳. 그래서 시장 속 작업실은 즐겁다.



미술 핏대 세워 대화하던 시절

미술계에도 이처럼 소통이 자연스럽던 시절이 있었다. “80~90년대 초까지는 작품을 주제로 대화가 가능했어요. ‘도대체 그 그림 그려서 어쩌자는 거냐’ ‘그런 선배의 그림은 왜 그 모양이냐’”고.

먹고 살긴 어려워도 순수예술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고나 할까. 목에 핏대 세워가며 작품에 대해 신랄하게 싸우기도 했단다. 서로 ‘이무롭던’ 시절이었다. 물론 참여냐 순수냐하는 80년대의 논쟁도 한 몫을 했다. 돌아보면 ‘치열함’ 그 자체가 당시 화두였지싶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사회적 이슈가 흐트러지면서 지역 미술계도 달라졌다. 다양한 동호회나 미술그룹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체됐고, 전시도 단체전보다 개인전 중심으로 흘렀다.

그 사이 시작된 광주비엔날레도 충격에 한몫을 했다. “설치미술이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들어간 거죠. 많은 작가들이 기존의 작업에 대해 회의하고 방황했어요.”

‘노가다’ 하면서도 작업을 고집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숫자는 눈에 띄게 줄었다. 생계 때문에 직업전선에 뛰어든 이도 있었다. 그나마 남은 작가 상당수는 광주 인근 시골의 창고 같은 작업실로 흩어졌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시절을 거쳐왔다.

그런 점에서 다시 소통의 기대감을 높여주는 대인시장이 반가울 수밖에.



창작인들은 문화의 ‘세포’ 단위

이곳에 터를 잡고 보니, 문화에 대한 생각들이 더 깊어진단다.

그는 창작인을 ‘문화의 세포단위’라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광주의 문화정책은 이들에 대한 고려 없이 곧바로 산업으로 연결시키려고만했다는 것. 그러다보니 자꾸 겉돌게 됐다고. “세포를 활성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거죠. 세포가 죽어가는데 문화가 어떻게 꽃망울을 피울 수 있겠어요.”

다행히 큰 흐름이 변하고 있단다. 예술인에 대한 지원도 점차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문화정책 입안자들도 순수창작의 중요성을 깨달아가고 있는 것 같단다. 물론 그래도 부족하다.

“힘을 받으려면 낟알을 모으듯 창작자들의 호응을 얻어야 해요. 비엔날레도 문화중심도시도 창작인들이나 시민의 자발적 호응이 바탕되지 않으면 모래성에 불과하죠.”

시민들의 자발적 호응은 시민 스스로 문화를 누림으로써 행복해지는 방법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고 했다. 하지만 문화강연이나 일회성 이벤트는 방법이 아니다. 삶 속에서 자연스레 풍성해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작가들이 상인들과 어울려 살듯이.



“미술은 범퍼와 같다”

그에겐 지난해 두가지 큰 경험이 있었다. 광주소년원 학생들과 함께 한 ‘드림캐쳐, 나도 작가’프로그램과 담양군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대상으로한 ‘컬러풀마인드’ 프로그램이었다. ‘드림캐쳐‘는 일탈하기 쉽고 피끓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미술치료프로그램’이었다. 그는 ‘치료’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들에 필요한 건 일탈의 에너지를 창조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일이에요. 예술은 그들의 에너지를 변환시키는 안전장치죠. 부딪혀도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해준다는 점에서, 미술은 자동차 범퍼와도 같아요.”

자원봉사로 진행했던 ‘컬러풀 마인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결론을 얻었다. 문화적 경계에 익숙치 않은 외국인 엄마와 그런 엄마 밑에서 자라는 2세들을 데리고 그림과 문장 수업을 진행했다. 분노와 부정과 저항에 익숙해있던 아이들을 미술을 통해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칭찬해주다보니, 아이들 마음이 정말 긍정의 방향으로 가더란다.

새삼 미술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단다. “미술이 소통의 중심에 서 있으면, 소통이 자연스러워요. 인도 여행 때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는데, 그걸 펼쳐보며 누구와도 자연스레 대화가 가능했어요. 미술은 전 인류가 공유하는 기호라는 말이 맞지요.”

그런 공유를 위해선 서로의 색깔에 대해 ‘틀리다’고 배척하지 않고 ‘다름’을 존중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꿈꾸는 건 다 이뤄볼 것”

그는 스스로 “내가 꿈꾸는 건 다 이뤄지더라”고 말한다.

‘섬마을에서 딱 1년만 미술선생 노릇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꿨는데, 2006년 그 꿈을 이뤘다.

신안군 안좌도의 중학교 미술교사 자리가 공석인데, 학생들 감소로 1년 뒤면 그 자리가 없어질 참이어서 지원자가 없다고 선배가 의향을 물어오더란다. 곧장 달려갔다.

그 1년을 아이들과 밀가루로 운동장에 그림도 그려보고, 테니스장 벽에 안좌도 출신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인 김환기 선생의 작품들을 아이들과 재구성해 그려 넣기도 했디.

그림과 함께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로망’도 이뤘다. 2002년 화가인 남편과 나인갤러리에서 공동 작품전을 열면서 결혼했으니.

앞으로도 꿈이 많다. 가까이는 작업실 근처에 두 아이를 맡길 탁아시설이 있었으면 좋겠고, 자신을 비롯한 지역 작가들이 먹고 살만한 문화환경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내 작업으로 다른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단다.

이와 함께 올해는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의 사회적 기업 ‘무돌아트컴퍼니’ 일도 하게됐고, 하반기에는 ‘행복한 그림’을 주제로 개인전도 가질 참이다.

그의 작업실엔 어린왕자와 비슷하지만 빠삐용 복장을 한 마스코트 그림이 걸려 있다. 실제 ‘빠삐용’이란 이름을 붙였단다.

“빠삐용은 자유를 의미해요. 제겐 창작의 자유를 의미하죠. 새해엔 그 자유를 억압하는 많은 것들이 잘 풀려나갔으면 해요.”

글·사진=이광재 기자 jajuy@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