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격동기의 보헤미안 화가 양수아

정열ㆍ낭만ㆍ예술혼한국 비구상 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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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미싱자수로 번 돈으로 야심차게 서울전 열었지만 호평 불구 실패술로 세월 보내고"
원숙기에 세상 등져장례식장에선 빨간 마후라만 울려 퍼지고

 

1972 10 15일 오전 10시께, 광주 풍향동 뒷골목 빈터에서는 이상한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광주상업고등학교 밴드가 장송곡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빨간 마후라' 주제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빨간마후라는 신상옥 감독, 신영균 주연의 파일럿을 다룬 영화로, 1964년 상영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다. 조문객들은 미협 지부장인 김흥남을 비롯, 강용운ㆍ배동신ㆍ조규일ㆍ국용현ㆍ진양욱 등 대부분 화가들이었다. 나직나직 빨간마후라를 따라 부르며 저마다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한쪽에 세워진 영정 속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축하라도 하듯 한 사내가 술잔을 들어올린 채 웃고 있었다. 시대의 가시면류관을 뒤집어 쓴 채 격동기의 복판에서 영혼을 탕진이라도 하듯, 남김없이 불살라버린 화가 양수아였다.

 

70년 당시 양수아는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한 채 심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68년부터 알코올중독 증세를 보이더니 그 즈음에는 더욱 심해져 있었다. 아침부터 취해서 지냈으며 깨어 있는 시간은 드물었다. 보다못한 시인이며 당시 한국일보 광주 주재기자였던 위증이 시화전 제안을 했다. 위증은 양수아보다는 열세 살 아래였으나 두 사람은 통하는 바가 많아 하루가 멀다하고 오센집과 금남로의 Y싸롱 등에서 어울렸다. 양수아가 그림을 그리고 위증, 손광은 등이 시를 지으며 송곡 안규동과 평보 서희환이 글씨를 쓰기로 정했다. 시화전 제목은 '유목민의 본적지'였다. 양수아와 위 증 등은 모두 이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머물 곳 없는 영혼의 방랑자들이었던 것이다.

 

이 시화전은 성공을 거뒀다. 양수아를 아끼는 사람들 모두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으며 그 당시 시화전은 제법 인기있는 전시종목이었다. 시인 권일송은 '정신 토혈과 방황하는 영혼 편력이 성숙한 이미지로서 형상화에 성공한 전시회'라고 평했다.

 

시화전 성공에 용기를 얻은 양수아는 마침내 서울 전시회를 통해 재기를 꾀하기로 결심했다.

서울 전시회는 양수아의 숙원이었다. 서울 전시를 위해 영혼을 갉아먹던 술도 끊고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욕심껏 그렸다. 구상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의 화단에 깜짝 놀랄 만한 '자유로운 영혼의 그림들'을 선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내 71 915일부터 21일까지 국립공보관 화실에서 양수아 전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