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격동기의 보헤미안 양수아

'불안한 가슴 메워줄' 女人과 '운명의 만남' 이뤄지고
48
년 목포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초빙

미술연구소서 '곽옥남 학생'과 만나
"
사회주의자 몰살" 소문에 결국 입산

 

1946 10, 양수아는 아베 에스코와 함께 고향 보성으로 돌아왔다. 에스코는 한국계 일본처녀였는데 안동신문사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양수아는 안동에서 에스코와 동거했고 둘 사이엔 아들 현승이 있었다. 해방이 되자 수아는 에스코의 간청으로 그녀를 일본으로 보내주기 위해 데리고 돌아왔다.

고향은 많이 변해 있었다. 겸백의 집과 농장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고 가족들은 보성읍으로 이거해 있었다
.

해방공간이던 1946년 정국은 극도로 혼란했다. 자주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열망으로 연일 찬, 반탁의 대립이 계속됐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 나날이 펼쳐졌다. 수아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가와바다 미술학교 동창인 배동신(당시 광주서중학교 미술교사)을 찾았다. 배동신의 소개로 전라남도 문교사회국 학무과에 교사직을 신청했다. 이어서 48년 목포사범학교가 개교되면서 그곳에 교사로 초빙됐다. 가족들은 가산을 정리해 장남인 수아를 따라 목포로 이사했다.

다음해에 목포 문태중학교 미술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해 김보현 선생의 목포 전시회에서 우연히 강용운을 만났다. 비구상을 공부하는 서로의 처지 때문인지 둘은 금세 어울렸다.

마침내 그는 호남동 대동병원 2층에 양수아 미술 연구소를 개설했다. 병원장과 절친했는데 '사상적' 으로도 뜻이 맞아 함께 '찬탁'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목포지역 조선미술가동맹에서 활동했다. 이 무렵 수아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불타는 듯 이글거리는 눈, 테너 가수처럼 맑고 힘찬 목소리, 그리고 멋진 웃음으로 한 눈에도 멋쟁이었다. 특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운명처럼 '곽옥남'이 찾아온 것도 이 때였다. 목포사범학교에 다니는 친구와 함께 미술연구소를 찾아왔다. 첫 느낌이 '불안한 가슴을 메워줄 아름다운 여자'로 다가왔다. 수아는 '곽옥남 학생'을 매우 아끼며 열심히 가르쳤다.

그해 4 3, 제주도에서는 무장대가 '단선ㆍ단정의 반대와 조국의 자주 통일, 극우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미군정 경찰과 서북 청년단 등을 향해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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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에는 새벽 315분께 제주도 주둔 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목 부위에 한 발의 총알이 관통된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 양수아의 동생 회천이 이 사건의 혐의자 중 한 사람으로 체포됐다. 8 8일 박진경 암살 사건에 대한 군법회의가 경비대 군기대 사령부(지금의 남산 도서관 자리)에서 열렸다. 수아는 초만원을 이룬 재판정에서 사랑하는 동생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다. 양회천 당시 이등 상사는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목포여자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기던 그해 1950, 7월 전주교도소에 수감중이던 동생 회천이 후퇴하던 국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 때 수아의 가슴엔 미군정에 대한 분노가 싹텄다. 민족주의와 정의감이 몰살되는 불합리한 광경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군은 북한의 군사행동을 소련의 공산화 전략으로 여기고 곧바로 전쟁에 개입했다. 7 14일 미국은 유엔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이승만한테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까지 넘겨 받았다.

남한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 북한은 후퇴할 때까지 3개월 남짓 여러 사회단체들을 조직했다. 수아는 목포지역 문화예술동맹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했다. 그는 사회주의 목적성 포스터를 그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김일성 초상화까지 그렸다. 당시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그런 식이었다.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국 하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합리적 이론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이론은 지식인들에게나 몽매한 민중들에게나 다같이 달콤한 파라다이스였다.

그해 9 28일 유엔군은 인천상륙을 계기로 전세를 뒤집어 서울을 되찾은 뒤 진격을 계속했다. 상황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간의 갈등으로 치달았다. 전쟁의 배후가 만들어낸 음흉한 수순이었다. 목포까지 이들이 진군해 들어온다면 사회주의단체에 가담했던 이들은 몰살을 면치 못하리라는 소문과 함께 극도의 불안감이 도시 전체에 내리깔렸다.

양수아는 입산을 결심했다. 특별한 사상이나 정치적 목적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단지 죽음을 벗어나기 위한 방책이었다. 입산을 결행하던 날 밤, 배낭을 메고 곽옥남의 대성동 집을 찾았다. 그리고는 곽옥남의 손을 끌고 자주 가던 동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구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내가 이렇게 단념하려 해도 단념할 수도 없고, 단념하며 헤어져도 보았지만 헤어질 수도 없다는 내용의 일본노래였다. 노래가 끝나자 어느 순간 "에스코는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 결혼하자. 지금 나는 어쩔 수 없이 산으로 간다. 결혼하지 말고 3년만 기다려다오."

가슴에 품었던 진심을 털어놓았다.

곽옥남은 잘가라는, 몸조심하라는 말도 못하고, 손 한번 잡아주지도 못한 채 사라져가는 모습만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안으로, 안으로 감추며. 양수아는 그렇게 후퇴할 때 대열에서 떨어져 나온 인민군과 함께 역사의 질곡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시인.문예비평가


양수아 부인 곽옥남 여사
전처 에스코, 남편 입산후 고초...아들과 일본으로 떠나

 

목여중을 다닐 때 처음 선생님을 만났네요. 그때 선생님이 목포에서 미술연구소를 하고 계셨는데 그곳에서 그림을 배웠어요. 그때 선생님한테는 일본여자가 있었네요. 아들도 있었구요. 저는 그냥 선생님으로만 존경하고 배웠어요. 아베 에스코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파요.

하루는 에스코가 한복을 차려입고 대성동 저희 집을 찾아왔어요. 스승에 대한 존경심 외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던 나에게 에스코는 "옥남이, 선생님이 옥남이를 사랑하는가 봐요. 옥남이가 보고 싶어서 병이 났어요. 어서 집으로 가봐요." 하면서 손을 끌었어요. 선생님은 제게 좀 일찍 그런 감정을 가졌나봐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네요. 미술연구소 바로 옆집에 사는 남학생이 있었는데 어찌 봤는지 저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품었나보데요. 그때 어리고 저는 아무것도 몰랐죠. 눈길 한번 안주고 하도 쌀쌀맞게 구니까 그 학생이 선생님께 찾아가서 통사정을 했더래요. 제발 저 여학생을 좀 만날 수 있게 주선을 해달라구요. 그러자 선생님은 대뜸 "미술공부 하는 착한 학생이다. 그러니 일절 다른 생각말고 가서 공부나 하라."고 호통쳐서 쫓아버렸대요.

그 학생이 공부를 잘해서 나중에 의사가 돼서 여수에 병원을 차렸어요. 선생님 그림을 좋아해서 여수 밀물다방에서 전시할 때 여러 점 사주었지요. 몹시 어려울 땐데. 훗날, 95년 무등일보 주관 양수아 회고전 할 때 같이 차 한잔 나누며, 그 얘기로 함께 웃고 말았네요.

 

그런 선생님이 그때 미술동맹위원장을 맡았는데 625가 나니까 그런 사람들 다 죽인다고 해서 지리산으로 들어갔어요. 그때 의학박사, 화가, 소설가, 사범학교 선생들 모두 들어갔습니다. 의사들이 다 가서 병원이 한때는 텅텅 비었으니까요.

산으로 들어가기 직전, 밤에 배낭을 메고 대성동 집으로 찾아왔데요. 그때, 잠시 산으로 몸을 피해야겠으니 3년만 기다려 달라더라구요. 선생님이 산으로 들어가고 나서 에스코는 모진 고초를 겪었어요. 집안도 말할 것 없이 몰살당했지요. 방도 파헤쳐지고 마루도 뜯어내고 난리를 쳤데요. 사람 내놓으라면서요. 당시 에스코는 일본계 은행인 조선은행에 다녔어요. 저는 목포 세무서에 다녔네요.

선생님이 산에 가고 나서 에스코가 저를 찾아왔어요. 한국발음도 잘 안되는 소리로 "옷남이 나는 여기서는 살 수가 없어. 여기 있으면 죽으니 아들 데리고 일본으로 간다."며 작별인사를 하데요.

저보다 7∼8세는 연상이었는데 정말 입에 담기 힘든 고초를 겪었죠. 선생님의 입산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때문에 정말 여러사람 고생했네요. 지금은 정말 현승이가 보고 싶어요. 그래도 선생님 핏줄인데 애들은 서로 만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찔한 세월들, 이젠 좀 제대로 정돈 좀 됐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시인ㆍ문예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