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격동기의 보헤미안 양수아

누가 이보다 격렬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빨치산서 교사로 한 여인의 남편으로 시대 앞서간 화가로
영혼의 상흔 안은 채 온몸으로 겪어온 예술쟁이였음을

 

양수아가 건너온 시기는 근대의 격동기였다. 1920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태평양 전쟁을 피해 중국 만주에서 청년기를 보낸 뒤, 해방공간기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 군정기인 1948년에 발생한 제주도 4·3사건 때에 동생을 잃었고, 한국동란기에 빨치산에 입산한 뒤, 전쟁부역자라는 굴레를 뒤집어 쓴 채 가난과 감시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보헤미안적 예술감성을 타고난 그가 이러한 격동기를 건너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것은 거의 기적이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 태어난 그의 작품들에는 영혼이 견뎌야 했던 시대의 상흔들이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다. 작품마다에는 예민한 화가의 감성판이 치유의 안간힘으로 울려대고 있다. 격동기를 건너온 화가의 첨예한 공명판을 보며 삶의 과녁인 창조와 진보라는 근본명제에 우리는 감동하며 전율하는 것이다
.

양수아의 작품은 크게는 드로잉과 구상화, 추상화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세가지 영역을 넘나들면서 그는 상처와 치유의 한 세계를 완성해냈다. 그의 예술세계 속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영혼의 상처와 치유의 과정이다. 이런 눈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면 잠복기ㆍ우울기ㆍ황홀기의 세단계로 나눌 수 있다.

 

● 1기 잠복기

1
기인 잠복기는 어린 시절인 일제 강점기부터 태평양전쟁을 피해 만주의 안동으로 건너갔던 1945년까지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예민한 감성판은 영혼의 표출을 위해 마구 그림을 그려대기 시작했고, 이 작품들은 거의 삽화수준에 가까운 드로잉들이었다. 이 시기에는 식민지 교육에 의한 압제의 답답함에 저항하는 몸짓들이 주로 내비치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영혼의 그림을 그리기 전의 삽화나 학습기인 정물 등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당시에도 드로잉작품 남자나 모리배·따진다 등에서 영혼의 도발이 조금씩 내비치고 있으며 정물 등에서는 지나치게 가라앉는 우울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엄격한 일제교육에 눌려있던 신경줄들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는 중인 것이다.

 

 

● 2기 우울기

2
기인 우울기는 45년경 안동 기자시절을 거쳐 귀국후 해방공간기를 지나 1948년 광주 미국공보원에서 첫 전시를 가진 이후 1956년 광주사범학교로 옮길 때까지다. 이 시기는 해방공간기와 동란기를 거치면서 작품들은 거의 유실돼 정확한 정황은 포착하기가 힘들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소수의 작품들과 스케치북이 남아있어, 우울의 진행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는 아직 추상작업이 본격화되기 이전이며 그의 고통과 그로 인한 우울증이 극에 달하던 시기다. 주로 파스텔을 이용한 구상작업인 정물화와 풍경화가 대부분이다. 이 시절에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의 영혼이 어떻게 억눌려갔는가 하는 점이다. 50년대 초에 그린 여인이나 거울보는 여자·여학생 등에는 지극히 가라앉은 분위기 중에서도 금세 도발될 것 같은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해방공간과 한국동란을 겪으며 그의 영혼이 가장 많은 상처를 받던 시기가 이때다. 화가의 예민한 촉수가 탈출구를 몰라 허둥대며 외로움과 고통의 나락에 나뒹굴던 시기다. 이 시기에는 특히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화가는 외로울 때 자화상을 많이 그린다. 영혼의 병을 심하게 않은 반 고흐나 폴 고갱도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자화상을 그렸다. 죽음이 눈 앞에 펼쳐진 듯한 우울의 극점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실감나지 않아 그림으로라도 본인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다.

사막에서 길을 잃어 외로움이 극에 달할 때, 때때로 뒤로 걸으며 자기 발자국을 확인하는 것이 유일한 위안인 것처럼.

이 때의 피난처 중 하나가 술과 미술 동지들이었다. 강용운의 소개로 광주사범 교편을 생활을 시작하면서 두 사람은 경쟁자로, 때로는 동반자로 실력을 겨뤘다. 또 배동신과의 만남은 무욕과 직관의 선승들처럼 말이 필요 없었다. 고수들끼리는 한 눈에 알아보고 단박에 악수한 뒤 작품으로 겨루는 것이다.

 

● 3기 황홀기

3
기인 황홀기는 그의 영혼이 극도로 도발되던 57년부터 세상을 버린 72년까지다. 이때 양수아는 생의 최고 작품들을 폭발하듯 그려냈으며 남은 열정을 한방울까지도 소진해버렸다. 특히 1959년에는 조선일보사의 주최로 '현대작가전'에 초대돼 서울화단에 그의 모습을 처음 드러내던 때이기도 하다. 1961년은 광주사범학교를 그만두고 양수아 화실을 개설하던 시기다. 이때가 오센집과 선선집, 기미코 집 등 술집을 매일같이 출입하며 숱한 일화를 남기던 때다. 이 때 그는 백색기를 거쳐 암갈색기로 건너가 비구상 작품의 절정을 꽃피워냈다. 백색의 기원은 그가 만주 안동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하던 때의 넓고 무한한 설원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암갈색은 더욱 완숙된 영혼의 색깔로 보인다. 한치의 흐트러짐이나 여백도 허용치 않는 치열하면서도 역동적인 붓놀림. 이것은 마치 베토벤의 열정소나타를 연상시킨다.

또다양한 색채와 빛이 뿜어져나오는 듯한 작품들은 쇼팽의 야상곡을 듣는 듯한 안정된 황홀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영혼의 함성들을 그는 1971년 서울의 '국립공보관 화랑'에 내걸었다. 그러나 이 황홀한, 영혼의 작품들을 사람들은 외면했다. 육체를 살찌우는 밥 한 그릇이 중요하지, 보이지 않는 영혼따위는 무가치할 뿐이었다. 그러나 육신을 움직이는 것은 영혼이며 양수아의 작품에서 뿜어져나오는 영혼의 율동은 반 고흐보다 역동적이고 황홀하다.

화가는 가장 아플 때 가장 황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가가 가장 아플 때 관객들을 환호한다. 투우사가 소의 뿔에 치받혀 쓰러질 때 관객이 환호하는 것처럼.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시대의 상처를 가장 극명하게 앓는 희생양이다. 잠수함의 토끼같은 존재다. 우리는 모두가 예술가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피투성이 양수아는 가고 황홀한 작품들만 남아 우리를 위안하고 있다. 시인ㆍ문예비평가

 

 

그때 그순간
아이들에게 보낸 이승에서의 '마지막 편지'

 

승철에게.

아버지의 서울개인전에 한가닥 기대를 걸었겠지만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온 식구가 한가닥 기대를 걸었겠지만, 나는 한가닥이 아니라 온가닥의 기대를 걸었단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향상의 길이지. 너무 비약을 할려고 하면 실패하기 쉬운 것이다. 지금 너의 환경 속에서 너는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엄마 괴롭히지 말고 동생들 잘 다스려라, 부탁한다.

승훈에게.

늘 편지 보내왔는데 답장하지 못했었구나. 열심히 공부해라. 아버지 술 마시지 말라고,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아버지도 술을 무지무지 조심하고 있단다. 빨리 집에 가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구나. 포도주 훔쳐먹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승찬에게.

너는 왜 아버지에게 편지 쓰지 않지? 글자를 못 쓰더라도 차츰 잘 쓰게 될 것으로 믿고 있으니 성적 나쁘다고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라. 영어로 편지 한 번 써 보낼래?

자랑스러운 딸 희숙에게.

자랑스러운 양님 딸 보고 싶구나. 더욱 더욱 발전해야 한다. 인생항로에는 한이 없는 것이다. 너의 편지는 아버지를 웃기기도 하고 울게도 한다. 더욱 공부 열심히 해라. 오빠들에게 너무 으스대지 말고. 오빠들 말 잘 들어라. 그리고 승걸이 코도 잘 닦아줘라. 네 부탁 다들어줄게.

코보짱 승걸에게.

코보짱은 왜 아버지에게 편지 한 장 안쓰지? 코 닦을 시간이 많아서 그렇구나. 역에 나가서 아버지 기다리다가 엉엉 울고서 집에 들어왔다면서. 소풍 가서 기분 좋았어? 아버지는 너 보고 싶어 죽겠다. 광주 내려갈 때 전보 칠게, 그때 나와주라. 반가와도 엉엉 울지 말고. 엄마 보고 십원만 하지마.

-
너희들의 아버지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