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격동기의 보헤미안 양수아

두 영혼 하나로 만나 눈물의 사랑꽃 피우다
포로수용소 간부 도움으로 무죄 석방
사상문제 반대속 목포서 결혼식 올려

 

전향서 제출과 함께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양수아의 몰골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동상으로 발가락을 절단해 한쪽 다리를 절었으며 빛나는 감성은 이미 조울증에 잠식되었다. 감정은 가망없는 현실과 황홀한 이상향 사이를 오가면서 조증과 울증을 수시로 반복했다. 그러나 빨치산의 혹독한 고통과 포로수용소의 벼랑같은 위기상황에서도 그가 놓지 않았던 것은 곽옥남에 대한 그리움과 그림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의 리비도는 그림과 곽옥남이 하나로 뭉쳐 재구성된 이상형에 온통 꽂혀 있었다.

곽옥남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띄운 뒤 수아는 풀려나던 그해 2월 무작정 부산으로 향했다. 당시 포로수용소에는 양수아와 오지호의 그림을 무척 사랑하는 헌병대 간부가 있었다. 이 간부에 의해 두 사람은 가까스로 무죄 석방됐고, 석방 직전 양수아는 어렵게 편지를 써서 곽옥남에게 전해주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곽옥남은 부친의 결혼강요를 피해 부산으로 내려갔고, 그 헌병대 간부는 부산까지 곽옥남을 찾아가 편지를 전해주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생사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호남인의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은 이처럼 뿌리 깊었던 것이다
.

당시는 도민증(주민등록증)이 없으면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상문제가 아직 걸려있는 양수아에게 도민증이 있을리 없었다. 그러나 양수아의 불타는 그리움을 제도 따위가 막을 수는 없었다. 빡빡 깎은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의 모습으로 양수아는 낭인처럼 부산으로 향했다. 숨어서 기차를 타고, 검문이 있을 때는 돌아서, 걷고 또 뛰어서 그는 마침내 부산에 도착했다
.

양수아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곽옥남에게 어느날 노을녘,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양수아가 불쑥 그녀의 하숙집으로 들어선 것이다. 편지를 받은 뒤, 정말로 오실 수 있을까, 막연한 기대와 헛된 꿈 사이를 무수히도 오가던 뒤채임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다. 수아의 눈은 유난히 불타고 있었으며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곽옥남은 말문이 막혀 터져나오는 눈물을 쏟고 말았다. 두 사람은 부등켜 안은 채 그 자리에서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두 사람은 밤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양수아는 입산 이후, 혹독한 고통 속에서 얼마나 그리움이 자라났으며, 그림에 대한 열정의 출렁임이 얼마나 자신을 괴롭혔는지를 털어놨다. 곽옥남도 부친의 결혼강요로 인해 부산까지 도망오게 된 경위며, 에스코의 일본행과 무참히 짓밟혀버린 집안 사정 등을 낱낱이 이야기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날이 새자 곧바로 부산생활을 정리하고 목포로 돌아왔다. 결혼은 곽옥남 집안의 반대가 가장 큰 장벽이었다. 6 25가 남긴 상흔중 가장 위태로운 것이 사상문제였는데, 그런 전력을 지닌 사람과 결혼을 시킨다는 것을 죽으면 죽었지 용납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주위의 반대와 염려는 아랑곳 하지 않고 두 사람은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러나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들에게 결혼이란 당장 현실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비용 마련을 위해 미네르바 다방에서 '양수아ㆍ곽옥남 2인전'을 열었다. 전시 제목은 '이목(
離木)전시회', 목포를 떠난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머잖아 자신들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더 넓은 곳으로 떠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6월 어려운 결혼을 감행했다. 결혼반지도 주고 받지 못한 결혼이었다. 당시 호남문화의 발원지라고 할 만한 목포에는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살았다. 박화성(소설가)과 차범석(예술위원장)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결혼식에 몰려들어 이들을 축하해주었다.

 

두 사람이 차린 신혼살림은 전시회에서 그림을 팔아 하나씩 마련한 살림도구들로 채워진, 그야말로 생계용 살림이었다. 양수아ㆍ곽옥남 두 사람의 정신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이뤄낸 위태로운 이상형의 뗏목이 망망한 바다에 띄어진 것이다.

시인ㆍ문예비평가

 

곽옥남 여사의 그때 그 순간
'수예점' 차린 뒤 일에만 매달려
남편은 형사들에 괴롭힘 당하고

 

"그때 저는 목포세무서에 다니다가 나중에 일본사람이 하는 부산의 선박회사에 다녔네요. 부산으로 제가 도망간거죠. 부모님의 결혼재촉을 피해서요. 선생님이 거기까지 찾아오셨어요. 정말, 저희 부모님이 심하게 반대를 하셨어요. 6 25 직후 그런 사람하고 결혼한다니 그렇지 않겠어요. 그래도 제가 택하고 저희 집도 아무 것도 없고 시댁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처음부터 가난하게 시작했고, 불행이 심어져 있었죠.

결혼할 당시 시댁은 시부모님, 시누이, 시아제 대가족이었어요. 선생님이 큰 아들이었죠. 선생님이 목포사범 창설시에 다녔는데 그걸로는 생활이 안되니까 수를 놓아 목포시장에 갖다 팔았네요. 그럭저럭 잘 나갔어요. 그러다 56년에 광주사범으로 오게 되어서 광주로 옮겼는데 여기서도 부모님을 모셔야 할 형편이었어요.

그래서 수예점을 하려고 맘 먹었네요. 정말 어렵게 용단을 내렸어요. 시아버님이 나락 판 돈을 주었는데, 만약에 잘 안되면 어쩌나 싶고 정말 불안했어요. 뒷심이 없으니까 그러대요. 그래도 한번 부딪혀 보자. 부딪혀야 깨지든지 뭐하든지 하겠지 하고 지금 계림극장 바로 옆에다 모던 수예사를 차렸어요. 그때 처음으로 미싱자수가 나왔는데 위궤양 때문에 미숫가루를 싸가지고 학원에 다니면서 미싱자수를 배웠어요. 그래도 그림을 그리고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 있어서 금방 잡히데요. 배움서 도안해서 하나씩 딱 만들어놓으면 그렇게 재미지데요. 나중에는 도매를 했는데 애기들도 몇 데리고 있었어요. 그때 저는 수예점을 아주 목숨을 다 바쳐서 했어요.

선생님은 언제나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그러셨어요. 제가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선생님을 더 잘 돌봐드리지 못해서 늘 죄송하고 후회스러워요. 빨치산의 아픔은 자신밖에 모르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아픔을 어루만져 드리지 못했어요. 선생님이 학교에 계셨지만 한 번도 월급봉투를 가져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돈을 안 벌면 자식도 못 가르친다고 생각하며 자나깨나 일만 했죠.

선생님의 꿈은 유학도 가고 싶어했고, 자신의 생각대로 그림도 그리고 싶어 했는데 항상 형사들이 괴롭히고 현실은 밑바닥에 있고, 집에 들어오면 여편네는 일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자기가 그리고 싶은 세계는 위에 있는데 항시 돈을 생각해야 하니까 뜻에 없는 그림을 그릴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 그림을 위조지폐라 그래요.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을 충분히 못그렸던 건 같아요.

집안이 조금 넉넉해서 그런 과거가 있더라도 뒷받침을 잘해주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빨리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