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격동기의 보헤미안 양수아

"영혼을 어찌 '규격'에 담을 수 있으랴"
'
뜨거운 추상' 고집세상은 외면

작품구입 부탁편지 '아픈 유서'
오지호 "세상이 죽였다" 눈시울

 

양수아는 전시회가 있을 때면 언제나 아내 곽옥남을 개막식에 참석시켰다. 화가를 꿈꾸던 아내에게 자신의 작품을 자랑하고 싶었고, 화가의 아내라는 자부심도 북돋워주고 싶어서였다.

그의 마지막 전시이며 최대 실패전이 되고만 여수전에도 아내를 불러냈다. 곽옥남은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에 얼마나 치명적 타격이 오는지를 뻔히 알면서도 남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참석했다. 그날, 양수아는 그 바쁜 아내를 붙들고 여수 오동도와 등대를 산책했으며, 식당에 들러한사코 마다하는 아내에게 매운탕을 한 그릇 사주었다. 양수아는 서울전시 실패이후 거의 밥을 먹지않고 지냈으며, 그날도 아내가 떠먹여 주는 국물만 조금 받아먹었을 뿐이었다.

 

버스정류장까지 배웅나온 양수아는 그날따라 어린아이처럼 아내에게 하루만 자고 가라고 졸랐다. 곽옥남은 달래듯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안아준 뒤 황급히 광주행 버스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들 부부의 마지막 이별 장면이 되고 말았다. 자유분방한 영혼의 그림들이 반드시 여수에서는 조명받아 화려한 재회를 꿈꾸었지만.

생계를 위해 단호히 떠나가야만 하는 아내를 보며 그 순간 양수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관방으로 돌아와 양수아는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수십통의 편지를 썼다. 그가 아는 공직자와 학교 교사들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작품을 설명하며 일일이 구입을 부탁했다. 그림을 사달라고 그렇게까지 자존심을 꺾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벼랑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과는 달리 여수에서는 그의 그림을 눈여겨봐주지 조차 않았다. 겉치레와 규격화된 정형에 길들여진 세상은 비규격과 내면의 세계에는 너무 냉담했다. 그들은 영혼의 자유와 가난한 화가의 읍소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때 양수아는 세상과 자신 사이에 문이 내려지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 수많은 편지들은 양수아가 세상에 내던진 유서가 되고 말았다.

양수아는 왜 그렇게 죽음처럼 외롭고 배고픈 추상화를 고집했을까.

그에게 규격화되고 정형화된 그림은 아무런 감흥도, 흥미도 주지 못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넘치는 영혼의 힘을, 노래하듯 뿜어내며 그려내는 추상만이 그를 사로잡았다. 영혼의 표출만이 그를 살맛나게 했다. 그의 그림세계는 기하학적으로 구도된 '차가운 추상'보다는 내면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하는 '뜨거운 추상'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정형화된 곳이고 눈에 보이는 현상과 풍경을 중시하는 곳이다. 그 육신을 움직이고 조절하는 원초적 영혼의 세계는 보이지 않고, 정형화되지 않아 불신당하고 질타당하는 곳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도 살아남기 위해 전시회를 열 때마다 몇 점의 구상화를 곁들이곤 했다. 그러면서 그런 그림들을 '위조지폐'라며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이 위조지폐조차 사람들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저런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작품들은 아예 믿지 못한다는 식이었다.

촌놈이다, 촌놈의 세상이다.”

내뱉으며 술병을 입에 댄 채 그는 여관방으로 돌아와 죽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아내에게 돌아갈 면목도, 다른 어떤 방법도 없었다. 이 황홀한 '영혼의 그림들'을 내팽개치는 박정한 세상과는 한시 바삐 등지고 싶었을 것이다.

 

양수아의 죽음 소식을 듣고 전남대 병원에 황급히 달려온 오지호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건 자살이다. 세상이 그를 죽였다.”

광주 풍향동 골목에서 치른 장례식에서도 술잔을 든 채 웃고 있는 양수아의 영정 앞에서도 한참을 바라보더니

이 놈아 이제 술잔 좀 내려놓고 제발 그림 좀 그려라.” 소리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양수아의 죽음과 전시 실패로 집이 신용금고로 넘어가게 됐을 때 곽옥남은 어찌할 바를 몰라 무작정 오지호를 찾아갔다. 오지호는 그녀가 화가의 아내라는 것만으로 시아버지처럼 그녀를 아꼈다. 사정을 들은 오지호는 양수아의 그림으로 갚으라며 급한 돈을 내어주었다. 곽옥남은 양수아의 그림 석점을 보내주고 오지호의 도움으로 넘어가는 집을 되찾았다. 며칠 후 오지호는 며느리를 통해 그 그림을 되돌려 보내왔다. 오지호는 곽옥남의 미안함을 덜어주기 위해 그런 소리를 했을 뿐이었다. 추상과 구상을 떠나 두 사람은 화가로서 서로를 아꼈으며 진정한 휴머니즘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시인ㆍ문예비평가

 

양수아 부부의 애틋한 편지

- 남편 양수아, 서울전 실패 후 답장

정말로, 정말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소.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소.

여기는 광화문 지하의 양과자 점.

조용히 매실주를 마시고 있소.

물론 나 혼자서.

< 중략 >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나는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돼서

돈도 벌 것이오.

서울에서 돈을 가지고 광주에

가리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의 노고를 생각하면

또 눈물이 흐르고,

나는 그렇게 눈물을

잘 흘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2, 3일 후에는 갈 생각이오.

뜨거운 키스를 보내오.

건강하게 걸어갑시다

 1971. -당신의 남편 양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