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화랑의 미술 전시장. 거대한 흰색의 큐브형 공간. 그림 그리는 이들마저도 선뜻 남의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다. 그 속엔 권력과 권위의 코드가 숨어있다.
백색 전시장 한 가운데 거대한 하이힐이 놓여있다.
독자 여러분은 지금 이 책에 보이는 사진만으로 작품을 판단하지지 말기 바란다. 이 하이힐은 번지르르하게 윤기 나는 광택페인트를 칠한 작은 조각품이 아니란 점을 환기시켜드리기 위한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 99.9%는 이 하이힐보다 높은 키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하이힐의 길이(신발 사이즈?) 또한 위압적이다. 그 거대한 하이힐의 길이는 300㎝가 넘고 높이는 210㎝에 이른다.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에게 제시되는 오늘의 첫 번째 과제는 이 빨간 하이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것인가이다.
이매리의 빨간 하이힐은, 크기를 제외하고 생각하면, 가장 먼저 성적인 코드를 연상할 수 있다. 전족, 패티시즘 등의 단어와 연결된다. 미국드라마 ‘Sex &The City’의 사라 제시카 파커가 연상되고 근대 심리학자 프로이드가 “발은 원초적인 성적 상징이며 구두는 여체를 상징한다”고 한 주장과도 상통할 수 있다.
하이힐은 신체를 왜곡시키면서 여성적 볼륨을 도드라지게 하는 숨은 도구이다. 거의 모든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굽 높은 투명한 하이힐이다. 피카소는 에펠탑의 곡선을 닮은 하이힐을 만들어 보였다. 국내에서도 박영숙이란 여성작가가 여성의 신발을 미술에 끌어들였다.
사진으로만 보는 이들에게, 빨간 하이힐은 충분히 에로틱하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하지만 여기서 감상을 끝낸다면 성실한 감상자가 아니다. 작가의 의도를 더 알아보기 위해서 작품이 놓인 방식과 공간을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한다.
일단 하이힐이 거대함을 놓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 앞에 작은 책이 놓여 있고, 뒤엔 조그만 의자가 놓여있다. 의자는 신분, 안정성과 통하고 책은 지성·역사·언어 등의 대치물일 것이다. 그 한 가운데 놓인 거대한 빨간 하이힐을 ‘여성’으로 이해한다면? 사회적인 역사적인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완벽한 존재’로서의 여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거대한 하이힐은 백색의 큐빅 갤러리 한 가운데 세워짐으로써 공간 전체를 규정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면 소품으로 놓여 있던 책과 의자마저도 의미를 잃는다. 작가가 역설적으로 거대한 책의 형상 밑에 작은 힐을 설치한 ‘의도적 공간’이란 작품을 비교감상하면서 더 확연히 굳어진다.
그런데 공간을 지배하는 설치미술, ‘의도적 공간’ 등이란 용어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 아닌가?
이매리는 2008년 조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논문의 제목은「포스트 미니멀(Post-Minimal) 공간에서의 ’비어-있음'의 문제」이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 근대 철학자 하이데거 등이 공간 특히 ‘없음(無)’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먼저 살폈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 오늘에 이어지는 도(道), 기(氣), 무(無), 이(理) 등의 개념을 살피고 무엇보다 ‘무’를 연구한다. ‘道可道 非常道’(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나,
‘천하 만물은 모두 유에서 생기는데, 유는 무에서 생긴다’(天下萬物지生干有, 有生干無)는 노자 도덕경을 인용했다.
그녀는 최근 미니멀리즘Minimalism-작가는 포스트미니멀Post-Minimal이라고 강조한다. 그 차이를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에 심취했다. 미니멀리즘이란 최소한의 행위, 표현으로 작품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기하학적인 형태와 선, 평면성, 단색조, 표현하지 않는 표현의 무위의 미술, 미술의 객관적이고 순수한 본질만을 보여주는 미술 등등이 사전적 의미의 미니멀리즘이라 할 수 있다. 미술사가 미니멀리즘 시대 쯤 되면 미술적인 것과 미술적이지 않은 것의 구분도 쉽지 않다. ‘무위의 예술’ ‘객관성’ ‘순수성’ 등의 단어에서 보듯 그것은 본질적으로 노자와 불가의 무위 사상에 상당히 유사하다.
이매리의 미니멀리즘은 평면과 설치, 입체와 공간을 모두 포함한다. 그런데 작가 이매리가 관심을 둔 ‘미니멀’은 공간+시간이며 이를 설명하는 데 존재와 부존재(無)의 개념이 유용하게 쓰였다.
동일한 규격의 막대가 동일한 간격으로 바닥에서부터 벽으로 연결된 작품들 ‘비어있음’ ‘Space-Zero’ 연작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조각품이라 할 수 없고 설치미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매리의 박사학위 논문을 잘 살펴보면 그녀는 존재와 부존재, 유(有)와 무(無)를 지극히 동양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無’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지각할 수 없는 뭔가를 발현하는 의미 공간이며, 시간적 공간으로서 무는 유와 동일하다. 불교적이며 도가적 세계관이라 할 이 아이디어를 작가는 그대로 작품을 통해 발현시켰다.
이매리는 이 규칙적으로 놓인 막대를 통해 “공간을 미니멀화한다”고 주장한다. 놓여있는 작품의 명암의 차이는 ‘그림자와 실존의 차이’와 같다. 관람자가 시야를 공간으로 확대해 작품으로 불린 ‘그것’이 놓여있음과 놓여있지 않음의 차이까지도 읽을 수 있다면 이매리의 ‘비어있음’을 완벽하게 감상한 것이다. 비어있음은 ‘비어-있음’인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하이힐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이매리는 공간 안에 하이힐을 놓아둠으로써 공간 전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작품에서 하이힐만 보면 그의 작품세계의 반도 보지 못하는 셈이다. 공간 전체를 보면 다시 하이힐이 놓여진 부분을 제외한 공간 역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이고, 이것은 동양화에서 너무도 빠지지 않는 ‘여백의 멋’과도 상통한다.
하지만 현대미술을 모두 이렇게 어렵게만 감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매리의 매력적인 빨간 하이힐을 Sexual한 이미지로 받아들이거나, 작가를 Feminism 전사로 생각하거나, 그가 그토록 열변하는 ‘비어있음’을 의도적 공간, 또는 미니멀 공간으로 생각하느냐는 소비자의 몫이다. 오늘날 순수예술은 대중예술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넘쳐나게 생산되고 있으며, 예술상품의 소비자는 대중사회 전체다. 그것은 오직 소비자이자 감상자인 나만의 의미체로 감상될 수도 있고, 교과서적으로 감상될 수도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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